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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X IZM] 애스컴 아카이브 인터뷰 #41 박준형
발간

[문화도시부평 X IZM] 애스컴 아카이브 인터뷰 #41 박준형

  • 등록일자2023-09-27
  • 담당부서문화도시센터 창조팀
  • 문의전화032-500-2175
  • 조회수473
  • 자료 간단설명

    [문화도시부평 X IZM] 애스컴 아카이브 인터뷰

  • 내용



    문화도시 부평과 웹진 이즘(IZM)이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마흔 한 번째 주인공은 < 개그 콘서트 >로 시작해 라디오에 자리 잡으며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물하는 개그맨 겸 DJ 박준형이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코미디는 손바닥 안 스마트폰에서 보는 것으로 더 익숙하겠지만, 그래도 한때 TV에서 사람들의 웃음을 책임지던 여러 개그맨과의 추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비록 공중파 TV 코미디 쇼가 사라진 지 오되었으나 여러 개그맨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대중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중에서 이제는 '장수 DJ'로 거듭난 박준형의 이름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상암 MBC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프로'였다. 사진 촬영을 위해 DJ석에 앉아 즉석에서 재미난 표정을 연출한 것은 물론, 인터뷰에서도 능수능란한 진행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대방출했다. 음악에 대한 불타는 사랑은 놀라울 정도. 그를 잘 몰랐던 사람에게는 그의 지난 궤적을 함께 짚을 기회가 될 것이고, 이미 팬인 사람에게도 음악과 웃음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알찬 대화가 될 것이다.



    개그맨이지만 DJ 활동으로 음악에 대한 감성과 식견을 드러내고 있다. 소위음악광이지만 개그 분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음악을 사랑하지만 개그는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라디오 세대로서 라디오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기 때문에 실제 어릴 때부터 라디오 DJ를 하고 싶다 생각을 품었다. 그런데 DJ를 아무나 시켜주는 것은 아니잖나. 그래서 개그맨으로 먼저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던 시기에 방송국에 DJ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보냈다. 그렇게 맡은 첫 프로그램이 '우비소녀' 김다래와 함께했던 2000년대 초반 KBS < 천하무적 >이다.

     

    개그맨 중에서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감성과 공감 능력이 없으면 개그를 짜기 힘들다. 개그맨들이 그런 쪽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과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벌써 MBC에서 < 2시만세 >를 진행한 지 10년이 넘었다. 정말 긴 세월 동안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에 강하다는 사실을 많이 어필했는데, 그렇다면 어릴 적 롤모델로 삼은 DJ는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역시 우리 때는 < 별이 빛나는 밤에 > 인기가 대단했다. 이문세 DJ < 별밤 >을 들으면서 수학을 공부했는데, 방송이 끝나고 확인하면 두 시간 동안 < 수학의 정석 >에서 푼 문제는 겨우 하나 정도였다. 그만큼 집중해서 들었다는 뜻이다. 당시 잼 콘서트나 보조 MC였던 이경규 선배가 맡은 코너 등이 기억에 남는다. 배우 박중훈 선배가 10시에 진행했던 < 밤을 잊은 그대에게 > < 인기가요 > 등도 많이 들었다.

     

    음악에 대한 감수성의 원천은 어디인가?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신 영향도 있고, 주말에 < 오미희의 가요산책 >을 들으며 인기 있는 가요 20곡을 열심히 듣기도 했다. 정말 재밌게 들은 터라 공테이프로 열심히 녹음도 했고, 배터리가 아까워서 리와인드는 볼펜을 꽂아 수동으로 돌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음악 중간에 DJ 목소리가 들어가면 싫기도 했다.

     

    21~22세 사이에는 영등포에서 리어카를 끌며 가요 테이프를 파는, 이른바 '길보드' 아르바이트도 했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하루는 어떤 아저씨가 리어카에 있는 테이프를 200만원에 전부 사면서 다시 오지 말라고 한 적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길 건너 음악사 사장님으로 나 때문에 장사가 안되어서 그런 것이었다. 내 치기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일은 바로 접었다. 재미도 있고 사회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한 경험이었다. 가요의 실제 인기를 체감하기는 정말 좋았다.

     

    당시 가장 잘 팔린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기억의 습작'이 수록된 전람회의 데뷔 앨범 < Exhibition >이다. 실제 훗날 라디오 진행을 하다가 방송국에서 김동률을 만났을 때 덕분에 대학 등록금을 벌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외 당시 서태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과 룰라의 음악이 함께 들어간 테이프나 '일과 이분의 일'을 부른 투투, 신승훈 등도 잘나갔다. 이런 독집뿐만 아니라 컴필레이션이나 클럽 댄스 메들리도 많이 팔렸고, 그중에서 눈에 확 들어온 테이프 표지가 사실 구준엽의 작품이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전체적으로 가요가 막 살아나던 시기였다.



    학창 시절 음악을 일깨워 준 가수와 노래도 알고 싶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당시 7~8살이었던 나에게 화성을 쌓아 만든 가성이 정말 인상 깊었다. 조용필을 너무 사랑해서 12 31에 방송하는 MBC < 10대 가수제 >도 흥미진진하게 시청할 정도였다. 조용필이 아니라 이용이 상을 타는 바람에 1982년을 올바르게 시작하지 못한 것도 같다. (웃음)

     

    이문세의 4 < 사랑이 지나가면 >도 충격이었다.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그女의 웃음소리뿐' 등을 들으면서 음악을 제대로 듣기 시작했고, 당시 조하문의 음악도 많이 들었다. 두 번째 충격은 중학교 2학년 여름 평상에 누워 라디오를 들으면서 만난 유재하의 '지난날'이었다. 이듬해로 넘어가면서는 '서울 서울 서울', '모나리자', '87년 서울' 등이 실린 < 10 Part. 1 >과 함께 조용필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서서히 조용필과 멀어졌지만 나는 꾸준히 좋아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에는 들국화의 '제발'을 정말 좋아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 들국화 II > 앨범을 들었다.

     

    소위 '팝 세대'라 불릴 수 있는 1970~75년생에 속해 있지만 팝 음악은 잘 안 들은 것 같다.

    가요만 파기에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히트곡 중심으로 들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A면 네 번째 곡까지 듣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팝 음악 중 내가 국내에 전파한 노래가 있는데, 바로 < 개그콘서트 > '패션 7080' 코너의 오프닝 음악이었던 킨(Keane) 'Everybody's changing'이다. 나중에 밴드가 페스티벌로 내한 공연을 펼쳤을 때 관중들이 노래에 맞춰 원을 만든 채 코너 속 우리처럼 워킹을 하고 춤을 췄다더라. 보고 희열을 느꼈다.

     

    음악을 좋아했으니 직접 음악을 제작하는 '갈프로젝트'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갈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는 이유는.

    '대박을 쳐야지' 하는 마음은 없고, 그저 창조적이고 싶다는 생각에 꾸준히 하고 있다. 실제 중학교 2~3학년 당시 기타를 열심히 피면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는 했다.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녹음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글 쓰는 일도 좋아해 원래는 작사를 꿈꿨는데 점차 음악을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작곡까지 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첫 작곡 결과물은 무엇인가.

    '부킹협주곡 G단조 줄리아나 아리아'. 웃기려고 만든 4분짜리 노래로 클럽에서 여자들을 유혹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쓴 곡이다. (웃음) 노래를 만들면서 내가 웃겨도 정작 듣는 사람은 웃기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웠다. 과거 영화 < 챔피언 마빡이 >를 찍으면서도 그랬다. 나를 포함한 개그맨들이 코미디를 다 짜면서 재미있다 싶어도 정작 촬영된 영상을 보면 별로였던 것이다. '부킹 협주곡'도 나중에 들으니 웃기지 않더라. 영화에서 느낀 괴리감을 음악에서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그래서 코미디 요소는 처음에만 있고 요즘에는 잘 안 넣는 편이다. 내 노래가 사람들이 돈 내고 들을 만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돈을 떠나 음악 창작을 하지 않았으면 많이 답답했을 것 같다.

    그렇다. 노래는 사람의 흥을 돋우니까. 이것이 음악의 힘이라 생각한다.




    라디오 시그널 음악도 많이 작곡한 것으로 안다. 제작에 있어서 주안점을 둔 것이 있다면.

    히트를 거둔 MBC 시그널 음악을 비롯해 꽤 많이 만들었다. 라디오는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하니 신나게 갈 수밖에 없다. 빠른 템포에 맞춰 활기찬 가사로 '우리 다 함께 라디오를 듣는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등의 메시지를 넣는다. DJ가 직접 로고송을 만드니 PD도 정말 좋아했다.

     

    '갈프로젝트'에서도 'To… 쯔위'라는 나름의 히트곡이 있다.

    원제는 학창 시절 책상 서랍 속, 시간표 등에 사진을 붙여 놓을 정도로 좋아했던 배우 '왕조현'이다. < 천녀유혼 >을 보고 반해, 그날 밤새 공부를 하면서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생이 되어 인터뷰에서 왕조현의 이름을 외치는 상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추억을 담아 만들었는데, 유통사 친구가 왕조현으로 하면 노래를 누가 듣겠냐 하면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트와이스(TWICE)의 쯔위로 제목을 바꿨다. 유튜브 조회수가 300만을 찍을 정도로 이슈가 되어서 쯔위도 노래를 알 것 같다. 가사를 보고 유부남이 왜 이러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트와이스의 팬 원스(ONCE)는 오히려 좋아해 줬던 기억이 난다. 다만 이슈만 만들어 주고 노래 흥행까지는 안 시켜주더라. (웃음)

     

    음악과 관련해서 실현하고 싶은 목표가 있나?

    로직이나 큐베이스 등의 쉬운 툴 덕분에 음악을 만드는 저변이 넓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옥석은 가려지는 시대다. 뭇 인디 밴드처럼 기막힌 음악을 내가 만들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꾸준히 하고 싶을 뿐이다.

     

    인천 사람은 아니지만 인하대 출신이다. 인천이 일명 '음악 도시'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 가진 이미지는 어떠한지 묻고 싶다.

    인하대 후문 앞 용현동에서 자취했던 사람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물가가 아주 좋은 곳이라는 사실이다. 술 마시러 가면 안주가 엄청나게 나오는 곳이 많았다. 풍요롭고 낭만 가득했던 모교 주변 풍경에 지금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대학생 시절 자유공원, 수봉공원, 월미도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도 많이 넓혔다. 대학생 새내기 때 월미도로 데이트를 가게 되면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인 줄 알았던 월미도가 사실 택시 타고 가는 유원지임을 깨달은 에피소드도 있다. 공부만 하던 고등학생에서 막 대학생이 되었으니 아는 게 있었겠나. (웃음)

     

    그리고 인천이 음악 다방도 많고, 하드 록과 메탈의 고장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연히 음악이 강한 도시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박준형의 캠퍼스 생활도 들려줄 수 있나.

    개그맨을 꿈꾸고 있던 당시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그 동아리를 만들었다. 인하공전과 붙어있는 탓에 인하공전 학생들도 우리 학교 쪽으로 많이 다녔는데, 이를 보고 연합 개그 동아리를 만들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푸하하'라는 동아리를 만들고 전단지를 온갖 곳에 붙인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점차 그렇게 되면서 인원이 200명까지 모였다. 회장이었던 나 외에도 < 웃찾사 > 'LTE 뉴스'로 알려진 김일희가 '푸하하' 출신 개그맨이다. 지금도 가끔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 밥을 사주고는 한다.




    코미디 얘기로 들어가 보자. 박준형 코미디의 핵심은 무엇인가.

    '참신함'이다. 오래 연명하다 보니 진부해진 감도 있지만 그래도 파생 코너가 많이 나온 것은 내가 보여준 신선함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실제 요즘 유튜브에서 활약 중인 < 피식대학 > 채널의 'Daily Korean' 시리즈도 내가 만들었던 '생활사투리'와 유사한 면이 있지 않나.

     

    코미디에 대한 영향은 주로 어디서 받았나?

    잡지와 신문을 많이 본 덕분에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웃긴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1998년도부터 4년 동안 대학로에서 매일 공연을 하는 극장 생활 덕분에 단련된 것에 가깝다. 극장 출신인 나와 갈갈이 패밀리 사단이 이렇게 경험이 쌓이면서 공개 코미디에 최적화된 호흡을 얻었다. '사랑의 가족' 등의 코너에서 보여준, 한 템포 뒤에서 들어가는 개그도 이렇게 체득한 것이다.

     

    소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며 연습한 사람들이니까 다른 코너보다 앞설 수 있었다. 정종철이 잘 살려준 '마빡이'도 극장 시절부터 '건들건들 건달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만든 아이디어였다. 우리의 성공을 보고 이후 < 웃찾사 > 개그맨들이 벤치마킹하여 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 개그 콘서트 >는 우리나라의 새천년 웃음의 동의어와 다름없다. 본인이 여태 아이디어를 낸 코너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정말 많지만 그래도 '갈갈이 삼형제'. 내가 아직도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 코너가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 잘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잘 사는 것 같아 '갈갈이 삼형제'에게 고맙다.

     

    박준형을 포함한 여러 개그맨에 힘입어 < 개그콘서트 >가 정점을 찍었지만 지금은 코미디가 거의 사장된 시기다.

    사실 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니까. 관객을 앞에 둔 당시 코미디 문화가 나와 잘 맞아 성공할 수 있던 것이고, 지금은 또 다른 형식의 코미디가 흥행을 하고 있다. 나한테는 크게 먹히지는 않고, TV 포맷에 어울리는 스타일도 아니라 생각하지만 애초에 요즘 사람들이 TV를 거의 안 보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런 변화를 따르는 것이다.

     

    박준형도 이제 나이가 50을 앞두고 있다. 중장년층에 돌입한 시점에서 박준형의 앞으로의 목표를 묻고 싶다.

    선배들을 보면 50세에 들어서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서 성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30대 초반에 성공하고 이후에는 인기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한계가 있나 하는 생각도 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바둑이나 게임도 경험이 많은 50세보다 젊은 20세의 실력이 더 뛰어나지 않나. 전성기가 지나가면 이제 남은 게 없는 것인지, 초기에 비해 내가 무뎌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도 이런 의심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더 노력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려 한다. 50대만의 ''으로 계속 뻗어 나가고 싶다.


    진행: 임진모, 장준환, 정다열, 한성현
    정리: 한성현
    사진: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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