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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X IZM] 애스컴 아카이브 인터뷰 #54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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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X IZM] 애스컴 아카이브 인터뷰 #54 이정식

  • 등록일자2024-12-12
  • 담당부서시민창조팀
  • 문의전화032-500-2165
  • 조회수72
  • 자료 간단설명

    [문화도시부평 X IZM] 애스컴 아카이브 인터뷰

  • 내용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부평과 함께 하는 < 애스컴 아카이브 부평사운드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쉰네 번째 주인공은 대중음악과 재즈의 가교(架橋) 연주자 이정식이다.




    이정식의 연주는 수더분하기에 어디든 잘 묻어난다. 40년이 넘는 활동 중 서태지, 신해철, 김건모 등 거물들의 음악에 다수 참여함은 물론, 올해까지도 윤복희와 무대에 오르는 ‘롱런’의 이유다. 한국 대표 재즈 뮤지션으로 해외 유수 연주인들과 협업하고 여러 상징적 장소에 올랐다. 영화 < 블루 자이언트 >에 나올 법한 커리어를 이미 오래전 이룬 그는 지금도 색소폰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인천에서 색소폰 동호회를 운영 중인 이정식은 취미 수준부터 열정적인 사람들까지, 여러 눈높이의 연주자들에게서 다양한 시각을 배운다고 언급했다. 기본을 살뜰히 챙겨온 경력이 그 모두의 시점에 맞출 수 있는 혜안을 주었을 텐데도, 그는 자기 공을 타인에게 돌리며 겸손함을 풍겼다. 재즈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품은 대화에서 또 한 번 배웠다, 입을 타고 흐르는 연주와 말은 태도를 숨길 수 없다는 걸. 수더분한 이야기를 찻잎에 띄웠다.




    이즘과 19년 만에 다시 조우한다. 요즘 근황을 말해준다면.

    2001년부터 강사로 부임해 지금은 정년을 세 학기 앞둔 교수로 수원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크레용 팝 초아, 웨이 같은 친구들이 제자로 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예전같이 활발하게는 아니어도 내가 구성원으로 있는 밴드로도, 서울 재즈 콰르텟에서도 연주하며 공연을 이어가는 중이다.


    인천에서 색소폰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다. 어떤 활동을 하며, 중심지를 인천으로 둔 까닭이 있는지 궁금하다.

    만들기 전에 색소폰을 취미로 연주하는 인구 수요를 조사해 봤다. 인천, 시흥 같은 몇몇 지역에 색소폰을 다루는 이들이 매우 많더라. 서울에도 동네마다 있는 편이지만 인천은 특출나게 많았다. 지금 우리 구성원만 해도 70명 정도가 되니까. 그들과 함께 크지는 않더라도 지역의 복지관을 순회하며 공연하는 등의 활동도 하고 있다.


    동호회 활동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동호회에 오시는 분들은 취미의 영역부터 탐구까지 다양하다. 사랑방처럼 오셔서 수다를 떠는 이가 있는 반면, 어린 학생들보다 열정적으로 진지한 태도를 보이시는 분도 있다. 다양한 눈높이에 맞춰서 지도를 하다 보니 더 큰 재미를 느낀다. 그간 재즈 관련한 사람들만 만나다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배우는 점도 많다.


    인천 논현동에서 모이는 것뿐 아니라 공간까지도 만들었다. 이유가 있나?

    색소폰을 굉장히 좋아하는 후원자가 있었다. 내 이름을 빌려 색소폰의 장을 열어보고 싶다고 하더라. 나보다도 그분의 공이 컸다. 삼고초려 이상으로 거듭 묻기에 학교에서의 강의 때문에 매일은 못 나가지만 조금이라도 참석해 보겠다고 답했고, 그렇게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인천에 색소폰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 것 같은가, 오가면서 보이는 점이 있는지.

    재즈뿐 아니라 인천이 음악에 표하는 애정이 센 지역이다. 헤비메탈도, 민족 음악도 인천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돋보인다. 그만큼 음악에 관심 있는 인구가 굉장히 많다. 같은 이유로 색소폰 연주자 또한 많은 게 아닐까.




    대한민국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주로 셋이 거론된다. 이봉조, 정성조, 이정식. 앞선 두 뮤지션의 후대로서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렇게 엮이니 나에게는 영광일 따름이다. (웃음) 두 음악가의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 이봉조 선생은 감각적이고 한국적인 연주를 구사하기에 인간미가 난다고 할까. 반면에 정성조 선생은 아카데믹하다. 미8군 출신이다 보니 서양적인 정취가 물씬 풍겼다.


    그렇다면 선후배 모두를 포함해서 좋게 보는 국내 색소폰 연주자가 있는지.

    선배로는 앞서 언급한 이들 외에도 클라리넷도 잘 부는 이동기 선생이 떠오른다. 후배를 꼽자면 재즈클럽 ‘야누스’에서 주로 연주한 것으로 유명한 신동진의 아들인 신명섭의 연주를 인상 깊게 들었다. 유학에서 배워온 점도 있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는 기본 감성을 악기로 잘 표현하더라. 자신만의 것을 구사할 줄 안다는 점에서 좋게 지켜보고 있다. 한국적인 재즈를 잘한다. 한국적이라는 게 비단 국악과 퓨전 재즈를 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고, 한국인이기에 느끼는 감정을 재즈에 잘 담아낸다는 의미다. 젊은 뮤지션 중에 이런 시도를 하는 연주자가 늘어나는 게 고무적이다.


    이정식을 색소폰으로 이끈 매력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중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으로 시작했다. 당시 1, 2년 정도 선배가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멋있기도 했지만 소리가 따뜻하다고 느꼈다. 나중에 들은 건데, 누가 말하기를 색소폰 소리가 인간의 목소리랑 가장 비슷하다는 말도 하더라. 그런 만큼 거부감이 가장 없는 악기였던 듯하다.


    본인이 생각하는 ‘이정식 색소폰’의 정체성, 핵심이 궁금하다.

    글쎄, 그동안 쭉 해보니 결국은 깊이 있는 심오함도 필요하고 남들이 보기에는 의미 없다고 할 만큼 단순한 방식도 필요한 것 같다. 대중적인 어필은 그 간극을 어떻게 잘 맞추냐에 달린 셈인데, 재즈를 어려운 음악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에게도 최대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를테면 색소폰으로 트로트를 연주할 때 그 음악들이 가진 고유의 정서를 재즈에 이식하기 어렵더라도 최대한 구현해 내려 하는 식이다. 실제로 대중화에 노력하며 활동해 온 흔적이 돋보인다.


    앞서 언급한 트로트 혹은 리메이크 작품 등 다양한 연주를 했는데, 본인 기준에 가장 만족스러운 곡이 있다면.

    어렵다. (웃음) 누군가에게 “내가 연주했는데 이 곡 들어봐”라고 하는 건 정말이지 부끄러워서 못 하겠다. 오히려 최근까지 즉흥적으로 편곡한 연주를 유튜브에 올리곤 하는데, 오히려 그런 게 힘을 빼서 더 편하게 들리는 것 같다. 지금 생각나는 건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나 백년설 선생의 ‘고향설’이다.




    재즈와 처음 연을 맺게 된 시기에 대해서 들려줄 수 있는지.

    함평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 전부터 악기는 다뤘기에 연고 없이 떠돌아다니며 살롱이나 클럽 같은 곳에서 연주하면서 음악을 직업 삼고자 했다. 어떤 곡을 듣고, 구사해야 성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탄강 인근 살롱에서 공연하다 친해진 미군들이 LP를 선물로 주더라. 받은 것들을 들어보니 노래는 안 나오고 계속 연주만 이어지는 거다. 색소폰, 트럼펫, 드럼… 가끔은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의 ‘Take five’ 같은 귀에 익은 멜로디에 정겨움도 느끼며 호기심 속에 입문했다. 당시에는 그게 재즈인 줄도 몰랐다. (웃음) 그러다 김강섭 악단의 공연 멤버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에 잘나가는 뮤지션은 다 거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테너 색소폰 김수열 선생, 트럼펫 강대관 선생, 퍼커션 이복조 선생 등. 그런 분들이 공연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 가면 “너는 어떤 음악을 하고 싶니?” 물었다. 치기 어린 마음에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보고 싶다고 했더니 “꼭 재즈를 해야 한다”고 답이 돌아왔다. 소개를 받아 이판근 선생께 재즈 이론을 매주 버스 타고 다니면서 배우며 시작했다.


    시작부터 중요한 순간들을 많이 마주한 듯하다.

    1982년쯤 김강섭 악단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거기서 이판근 선생 같은 은사도 만나게 된 거니까. 색소폰 리드를 구하기가 힘들었던 시기에 몇 장씩이나 턱턱 주시던 분이다. 그가 이론을 가르치며 재즈 음반들을 들려주는데, 미군들이 들려준 곡들이 더러 나오는 걸 보면서 재즈를 모르던 시기부터 재즈에 매력을 느꼈다는 걸 알게 됐다. 선생께서 야누스 같은 재즈 클럽에서 활동도 하셨으니 공연을 보면서 성장했다.


    이정식이 재즈 클럽에 처음 서게 된 건 이태원 소재의 ‘올댓재즈’로 알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유명한 곳에서 데뷔전을 치렀는데.

    당시에 재즈를 어떻게 하는지도 감이 안 온 상태에서 4명 구성의 밴드를 꾸렸다. 이 또한 참 행운이었던 게, 장소가 이태원이다 보니 외국인이 많이 왔다. 일본의 프로모터가 와서 공연을 보고 한국의 젊은 재즈 뮤지션으로 우리를 지목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이 있던 시기에 < 한일 재즈 트레인 >이라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에 건너가 연주하고 일본 음악가들도 한국 와서 공연하는 현장에 함께하며 도약을 시작했다.


    대중음악 세션 활동을 겸한 것도 비슷한 때로 기억한다.

    맞다. 계속 연주를 이어가고 있던 1980년대 중후반에 우리나라에 변진섭을 필두로 발라드 음악이 꽃피웠다. 발라드를 주로 하는 음악가들도 “저런 사운드로 내 음반을 채우고 싶다”며 우리 공연을 더러 보러 왔었고, 수락을 받아들이면서 활동의 범위를 넓히게 됐다. (그중 색소폰 음색과 잘 맞는 대중 가수가 있다면?) 음색 면으로만 본다면 이광조. 더 넓게 보면 지금도 1년에 두세 번씩 꾸준히 함께 공연하는 윤복희 선생을 들겠다. 노래하는 이들 중 그처럼 재즈 세션들에게 적극적인 제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무이할 거라 생각한다.


    재즈를 알리는 데 공헌한 CBS에서 진행한 라디오 < 이정식의 올댓재즈 > 또한 빼놓을 수 없다.

    1995년에 < 0시의 재즈 >로 시작해 13년 정도 방송했다. 진행자로 녹음에 참여하며 재즈의 정보를 많이 알게 되기도 했고, 해외 재즈의 반향 등을 많이 알게 되면서 연주 외적으로도 공부하는 좋은 계기였다. 국악과 협연을 하기도 했고, 방송에서 재즈를 알리기도 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뿌듯한 커리어가 있는가.

    오히려 나는 아쉬움이 더 남는다. 그런 활동이 활발할 때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 후배들에게 더 귀감이 될 수 있어야 했는데 싶고. 잘 했던 것보다 못 한 것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내가 힘든 걸 감수하고 고생했으면 더 발전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았는데 기회를 놓쳤다. 부분마다 획기적인 프로젝트들을 맡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리석고, 어린 마음으로 악기를 잡았던 생각이 스친다. 그럼에도 그중에 의미 깊은 기억을 하나 꺼내자면 한국 재즈 뮤지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단독 공연을 했던 일. < 코리안 재즈 스탠다드 – 화두 >라는 타이틀로 1990년대에 공연했다. 상징적인 장소에서 재즈 연주인 최초로 이름을 내걸고 무대에 오른 건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기회였다.


    앞서 말한 ‘획기적인 프로젝트’ 중에서도 하나 궁금하다. 기억에 남는 게 더 있다면.

    해외 공연도 많이 했다. ‘아시안 재즈 올스타즈’라고 해서, 일본의 트럼펫 연주자, 드러머, 홍콩의 기타리스트, 싱가포르의 피아니스트 등 아시아 각 나라의 탑 뮤지션들이 모여 월드 투어를 다녔다. 그중에서 한국의 대표로 무대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북미, 아시아 투어를 많이 진행하고 뉴욕, 일본의 블루노트 등 여러 지역을 횡단했다. 지금에야 돌이켜 보면 참 좋은 기회였으나, 당시에는 바쁘고 치열하게 움직였기에 힘들다고 느끼고 그저 고생하며 지나가는 하루하루라고 느꼈다. 영광스러운 면을 보기보다 자신의 힘듦을 크게 본 이런 생각들을 어리석다고 느꼈다는 거다.


    연주를 듣다 보면 여러 발성을 구사한다. 테너 혹은 소프라노 중에 더 편한가?

    편한 건 테너가 편하다. 소프라노는 압력이 세고 음폭이 어느 정도 한계가 정해져 있다면, 테너는 경계선이 희미하고 자신의 능력만 되면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테너는 훅 불면 그대로 소리가 출력되는 편이라 더 쉬운 것 같다.


    이즘 공식 질문이다. 인생 뮤지션으로 꼽는 연주자가 있다면.

    여러 명이다. 국내 연주인으로는 이전에 언급했다시피 이봉조 선생. 소리가 구수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이런 시골 냄새를 풍기는 연주는 정말 드물기에 좋아한다. 해외에서는 웨인 쇼터(Wayne Shorter)와 아카데믹한 매력의 마이클 브레커(Michael Brecker)가 있다. 마이클 브레커는 팝 시장에서 활발히 활동했기에 처음에는 재즈 뮤지션인 줄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되고 폭이 넓다고 생각했다. 대중음악까지도 사로잡는 면에서 배웠다. 웨인 쇼터는 얼핏 듣기엔 엉성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시원한 음색을 느끼게 된다. 비슷한 류로 찰리 파커(Charlie Parker)도 있을 텐데, 즉흥성이 강한 연주라는 첫인상을 파고들면 음계가 다 맞는 신비한 천재다.


    색소폰 명곡, 명반 또한 골라본다면 어떤 곡이나 앨범이 있나.

    앨범으로는 존 콜트레인의 < Ballads >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곡으로는 실 오스틴 ‘Danny boy’도 명곡으로 빠질 수 없겠다. 스탄 게츠 ‘Black orpheus’까지가 질문을 듣고 생각나는 음악들이다.


    오늘의 인터뷰를 가볍게 훑자면 일관된 답변으로 ‘아쉬움’이 가장 많이 대두됐다. 그럼에도 아쉬움 말고 다른 차원에서 자평해 본다면 어떨까.

    음악에 쏟는 마음과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한 노력한 바를 감사하게도 타인이 잘 알아주었다. 음악, 재즈를 하는 후배들이 항상 선배 대접해 주고, 아이들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해주는 것을 보며 감사한 삶을 누렸다고 여긴다.




    진행: 임진모, 손민현, 임동엽, 정기엽

    정리: 정기엽

    사진: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