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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X IZM] 애스컴 아카이브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부평과 함께 하는 < 애스컴 아카이브 부평사운드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마흔여섯 번째 주인공은 인천 음악창작소 포트락(PORTROCK)의 소장을 맡고 있는 기타리스트 태지윤이다.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과거 KBS < TOP밴드 >에 출연한 바 있는 밴드 파티메이커, 얼터너티브 메탈 밴드인 카인드 오브 포이즌, 그리고 현재 포트락의 소장까지. 이력이 상당한 인물이니 질문지를 꾸릴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여러 생각이 많았던 인터뷰다.
약간의 걱정은 그가 보여준 음악에 대한 열정 앞에서 단숨에 사라졌다. 인디 뮤지션으로 활동했던 선배 입장에서 신인 밴드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생각을 전하다가도 록을 향한 오랜 사랑을 드러내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던 그와 재밌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역시 음악만큼 사람 간 순수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록밴드 ‘파티 메이커’ 리더이자 2019년 결성한 ‘카인드 오브 포이즌’의 멤버 등 이력이 다양한데 그중에서 가장 위에 뜨는 것은 ‘인천 음악창작소 소장’이다. 일단 인천 음악창작소 포트락이 어떤 곳인지 설명을 부탁한다.
인천 음악창작소 포트락은 전국에 있는 음악창작소 17개 중 16번째로 생긴 곳이다. 음악창작소의 기본 업무는 공통적으로 인디 뮤지션들이 앨범을 만들 수 있도록 제작부터 녹음, 발매까지 모든 과정을 다 지원해 주는 것인데, 이외에도 음악가와 일반 시민 대상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소규모 거리 공연이나 잡지 제작 사업 등도 한다. 보통 다른 지역의 음악창작소는 재단이나 진흥원의 한 부서 형태라 업무가 한정적인 곳도 있는 편인데, 인천 음악창작소는 인천 음악콘텐츠협회에서 시에게 위탁을 받아 민간으로 운영 중이다. 독특한 구조 덕분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악기 연주 챌린지나 전국 청소년음악 경연대회 ‘나스락 페스티벌’ 등 공연을 활발히 주최한다.
인천기업 스쿨뮤직과 공동주관의 형태로 운영 중인 행사다. 인천 음악창작소에서는 기획과 모든 진행을 맡고 스쿨뮤직에서는 홍보와 행사에 필요한 부상, 즉 학생들에게 수여될 악기를 협찬해 주고 있다. 각 기관이 잘하고, 강점을 가장 잘 살린 행사라 말할 수 있다.
지역 행사는 참여도가 제일 중요한데 많이 참가하는 편인가?
올해 한 100팀 정도니까 굉장히 많은 편이다. 심지어 이번엔 제주에서도 한 명 왔다.
인천에 이렇게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음반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Kyoto’라는 곡을 발매한 근처(Nearby)라는 4인조 밴드가 있다. 순창 출신 둘에 한 명은 세종, 한 명은 광주에서 왔는데 이 친구들이 지방에서 인천으로 오니까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 서울로는 왜 안 갔냐고 물어보니 일단 경제적인 면도 있겠지만 인천에 다양한 행사들도 많고 무언가 기회가 많은 도시 같다는 것이다. 인천에서 꽤 오래 일한 나로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니 인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포트락에서 맡았던 베이루트 택시와 디폴트라는 팀이 올해 <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 무대에 오르기도 했는데.
페스티벌 주관사인 인천관광공사 쪽에 작년부터 우리가 발굴한 괜찮은 팀에게 무대 기회를 주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계속 제시했다. 물론 우리도 공정하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EBS < 스페이스 공감 >이나 네이버 < 온스테이지 > 등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는 팀 중에서 추렸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겠지만 페스티벌 무대에 한 번 올랐다고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닐테니 이제부터 팀들이 직접 열심히 해야 할 일이다.
열성적으로 안 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경우도 거의 없지만, 반대로 음악적으로 괜찮은데 음반 발매 이후 활동을 안 하는 팀도 있다. 포트락에서 상반기와 하반기, 일 년에 총 두 번을 심사하는데 라이브 심사 단계에서 공통적으로 앨범 발매 이후 어떻게 활동할 것이냐를 묻는다. 그런데 ‘홍대 가서 클럽 공연 돌 생각이다’ 같은 쉬운 대답도 못 하는 친구들도 있더라. 그런 것이 안타깝다.
사업의 주안점으로 삼는 포인트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인천이니까 연고를 두거나 이쪽에서 활동을 많이 했고, 또 하고자 하는 팀을 중점적으로 잡으려 한다. 또 음반 제작 외에도 학교 로고송 제작 사업도 있는데, 학생들이 가사를 만들면 우리가 적당한 제작비를 주면서 뮤지션들에게 곡 제작을 의뢰하는 방식이다. 공연 외에 여러 영역으로도 뮤지션들의 관심이나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포트락을 운영하면서 느끼는 아쉬움도 있다면.
세금을 받아 운영되는 공공기관의 속성이 있어 기획사 같은 역할은 할 수가 없다. 좋은 뮤지션을 선정해서 제작까지는 도움을 많이 주지만 발매 이후의 프로모션은 전적으로 그들에게만 맡겨지는 것이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대신 제작 과정에서 녹음도 열심히 봐주고 마스터링도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 등에 맡기면서 최상으로 해주려고 노력 중이다. 실제로 한 뮤지션은 우리가 기타 세션에 함춘호, 건반은 이승철밴드의 건반 연주자 박지운을 연결해 주기도 했다.
신인 밴드들에게서 보이는 최근 인디 음악의 트렌드가 있는가?
예전에는 믹싱할 때 대부분 해외 밴드를 레퍼런스로 잡았는데, 요즘은 국내 밴드들이 점차 알려지면서 국내 쪽을 벤치마킹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작년 사업에 선정된 팀도 실리카겔의 음반을 얘기했다. 우리는 제작사는 아니니까 뮤지션들의 생각이 확고하면 가급적 그들의 의견을 따른다.
이제는 거의 유행어가 된 ‘밴드 붐’이 그렇다면 조금씩 오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까.
관객이나 대중 입장에서 말하긴 어렵지만 살짝 상승기류가 보인다. 합주실을 운영하는 후배가 요즘 합주실 렌탈하기가 어려울 정도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스쿨뮤직 쪽에서는 코로나19 이후부터 악기 판매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내용을 들은 바 있다. 록 뮤지션들의 패션도 어느 정도 유행이 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또 최근 노엘 갤러거 내한 공연도 20대 티켓 판매량이 40~50대보다 많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나름의 좋은 신호로 보인다. 다만 실리카겔이나 데이식스 같은 팀이 인기가 있는 것과 한국 록의 부흥은 전혀 다른 얘기라 생각한다.
실제로 아직 한국의 인디 신 자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느낌까지는 아니다. 실질적으로 큰 규모로 살아나려면 어떤 요소가 필요하다 생각하는가? 저번 검엑스(GUMX)의 이용원은 소규모 라이브 클럽 공연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런 방안을 알았으면 나도 뮤지션으로 성공하지 않았을까. (웃음) 라이브 클럽 얘기에는 공감한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클럽에서 공연한다는 점에서 크라잉넛 같은 팀이 멋지다 생각한다. 물론 다들 회사에 소속된 입장이니 개인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겠지만 작은 공연장에 게릴라처럼 찾아오는 일이 많으면 관심이 계속 집중되지 않을까 싶다.
영미권에서는 역사 깊은 유명 밴드들이 무대를 뛰던 공연장이 지금도 잘 버티고 있고, 일본에는 아예 밴드가 주축이 되어 서로 품앗이하는 식의 페스티벌 문화도 있다. 이런 형태가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일본은 뒤쪽 순서 팀 무대도 끝까지 남아서 지켜봐 주는 매너가 있는데 우리도 그런 문화가 조금은 필요해 보인다.
말이 나온 김에 뮤지션으로서의 커리어도 얘기해 보고 싶다. 이력이 꽤 있는데.
2008년에 파티 메이커라는 밴드로 세 곡짜리 싱글을 내면서 2014년까지 활동했다. 그 이후에는 다른 밴드를 잠깐씩 하다가 카인드 오브 포이즌이라는 팀을 준비해서 2022년에 EP를 내고 지금은 내년 초에 정규작을 발매할 예정으로 녹음은 거의 다 끝난 상태다. 그 중간에는 개인 솔로 연주곡 EP < The First Memories >부터 싱글을 꾸준히 내고 있다.
음악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언제였나.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스쿨 밴드를 하면서 대학교까지 음악을 했다. 대부분 20대 초반에 일찍 음악에 집중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군 전역 이후 직장을 잡으면서 안정적인 환경을 만든 후에 제대로 시작한 편이다.
파티 메이커 당시에는 KBS < TOP 밴드 >에도 출연했다. 어떤 경험이었는지.
지금이라면 방송이 돌아가는 방식을 좀 알고 있으니 센스 있게 했을 텐데 그때는 너무 진심으로 해서 패자부활전 떨어지고 속상해서 인터뷰에 안 가기도 했다. 그래도 방송 출연을 계기로 조금 박차를 가해서 팀에서 직접 모은 돈으로 정규 앨범도 내고 이때 ‘행복의 나라로’ 리메이크를 계기로 한대수 선생님과도 조금 인연을 맺게 되었다. 원래 타인의 곡을 커버하려면 먼저 원작자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당시에는 이런 것을 전혀 몰라서 CD 300장을 다 만들어놓고 허락을 못 받으면 다 폐기해야 한다는 걱정으로 한대수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랬는데 그냥 “재밌게 했네!” 하면서 좋게 봐주셨다.
타이틀곡 ‘Get it down’ 같은 곡은 영어 가사로만 쓰기도 했다.
처음에는 록 음악에다가 한글을 붙이면 약간 이상하게 들린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영어로 가사를 썼다가, 나중에 점차 한글 가사로도 노래를 만들었는데 익숙해져서 그런지 영어가 조금 더 편한 감이 있었다. 한글로 하면 직설적이라 약간 유치할 수도 있는 표현이 간결하기도 했고. 딱히 깊은 생각의 결과라기 보다는 그냥 20대 중반 멤버들끼리 재밌게 만들던 시절의 곡이라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이나 콩글리시도 많다. 한대수 선생님도 영어가 순 엉터리라고 말하셔서 이미 CD 찍어서 재녹음이 힘들다고 말씀드렸던 기억도 난다. (웃음)
파티 메이커의 음악은 팝 메탈 성향이 뚜렷하게 보였는데 지금 개인 작업물은 연주곡을 하고 있으니 갭이 크다.
어렸을 때 워낙 팝 메탈 음악을 좋아해서 그렇게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나이가 들면서 팝 메탈의 향락적인 분위기와 실제 한국에서의 내 삶이 동떨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혼자 작업을 하던 도중 연주곡을 한 곡 만들게 되었는데, 그렇게 연주곡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솔로 싱글은 계절과 관련해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 같은데.
의미를 부여해야 좀 있어 보이겠다 싶기도 했고, 분기별로 싱글을 하나씩 내자는 개인적인 연간 계획의 일환이다. 두서없이 1월, 7월, 9월 이런 식으로 가는 것보다는 계절을 나타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여서 지금 이렇게 가고 있다. 홈 레코딩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세상이니 내년에 한 번 연주곡 정규 앨범을 내보고도 싶다.
연주 연습을 굉장히 열심히 하나보다.
퇴근 후에는 나도 힘들어서 그냥 쉬고, 주말에 TV 보면서 기계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일상이다. 기타리스트 조필성이 유튜브에서 했던 말 중에 ‘악기는 스포츠다’가 있는데, 나도 이 말을 따라 테크닉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 한다.
카인드 오브 포이즌은 어떤 팀인가.
얼터너티브 쪽으로 앨리스 인 체인스 느낌으로 무거운 음악이다. 솔로 연주곡 앨범 제작을 먼저 하고 있었는데 밴드 다운헬에서 노래했던 마크 최 형과 연락해서 결성하게 되었다. 인디 뮤지션이 두 팀 이상을 병행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이기도 하고, 내 솔로 음악과 카인드 오브 포이즌은 전혀 성향이 다르니까 어려움보다는 오히려 혼자 할 때 불가능한 것을 밴드 포맷으로 해서 더 재밌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태지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연주자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내 마음속의 기타리스트 1위는 오지 오스본 밴드의 랜디 로즈와 머틀리 크루의 믹 마스다. 지금도 가장 좋아한다. 대부분이 그렇듯 가족 중에 형의 영향을 받은 취향이다. 다른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도 있었지만 1순위 랜디 로즈와 믹 마스는 고정이었다. 머틀리 크루는 가장 좋아해서 형과 함께 은퇴 투어 당시 일본에 가서 보러 갔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이후 재결성해서 짜증 나기도 하고, 최근 싱글은 실망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웃음)
어렸을 때는 미국 록을 좋아했는데 점차 다른 국가의 록도 듣기 시작했다. 영국 밴드 중에서는 오아시스도 꽤 오래 좋아했고 콜드플레이도 많이 들었다. 특히 콜드 플레이는 ‘Fix you’ 같은 곡의 가사가 굉장히 현실적이잖나. 그런 내용이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공감이 간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머틀리 크루와 콜드플레이 중에 하나를 골라 멤버로 투어를 돌 수 있다면 무조건 머틀리 크루다. 일본 음악도 많이 들었다. 자드(ZARD)나 밴드 튜브(TUBE) 같은 팀도 많이 좋아한다.
마침 최근 국내에서 J팝이 많이 소비되고 있고 페스티벌에서도 일본 밴드가 많이 찾아오고 있다. 일본 음악이 지금 왜 국내에서 먹히는 것일까?
영국 음악이 단조로운 코드에서 좋은 멜로디를 찾아내는 식이라면, 일본 음악은 한 마디 내에서도 코드가 두 개씩 바뀌는 느낌으로 다른 게 있다. 착착 계산된 코드 진행과 악기 구성 같은 것이 반대되면서도 연주력은 동일하게 탄탄한 것이 매력이라 생각한다. 튜브의 기타리스트 하루야타 미치야도 보면 굉장히 연주가 빈틈이 없다. 미국 음악이 약간 즉흥적인 느낌이 있다면 일본은 그런 즉흥성이 거의 없는데 이런 것이 색다른 맛으로 다가오지 않나 싶다.
옛날 기사를 찾아보면 인천문화재단에 재직했던 시기라 겸업 음악인으로서 한 인터뷰도 있다. 선배 입장에서 지금의 인디 음악가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쟁쟁한 팀이 아니면 대부분의 인디 뮤지션들은 다른 직업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첫 앨범이 나왔던 2008년에 이미 직장에 다니는 상태였으니 음악인으로서의 기로 선택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비교적 없는 편이었다.
내 얘기는 아니지만 포트락에서 시행하는 해외 공연 지원 사업으로 작년에 몇 팀과 일본 후쿠오카를 갔을 때 클럽의 메인 팀 격인 ‘시마’라는 펑크 밴드를 만난 적이 있다. 그들과 얘기하면서 알게 된 내용 중 하나가 일본 밴드들은 대부분 3~4개월 장기간 투어를 하기 위해 8~9개월 정도 바짝 다른 직업으로 일을 하면서 준비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더 올라갈 기미가 보이면 음악에 전념하는 식이더라. 25세부터 30세 사이에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직업과 병행하면서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음악을 하는 게 답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현실을 탓하고 부정하기보다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좌우가 아닌 가운데의 길 같은.
나도 그래서 이런 나이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최대한 열심히 하되 어느 정도 막히는 순간이 찾아오면 적당히 마음을 비우고 직업을 가지면서 음악을 하는 게 더 길게 가는 길일 수 있다고 얘기해준다. 거기서 히트곡이 나오거나 수지타산이 될 정도면 음악으로 아예 뛰어들어도 되는 것이고.
인천 음악창작소 포트락을 운영하면서 목표가 있다면?
내가 있든 없든 인천에 대중음악 지원센터 같은 기관이 하나 생기기를 바란다. 지금 포트락은 음악 산업의 프로세스에서 제작 기능에 특화된 곳이다. 공연장도 만들어져서 선정된 뮤지션들이 같이 무대에도 오르고, 별도의 사업비를 통해 행사와 축제 개최나 앨범 제작 등도 전반적으로 담당하는 특화된 조직이 하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한다. 인력과 예산 모두 지금보다 더 큰 규모로. 전국 지자체에서 버스킹 사업을 많이 하는데 야외 공연이라도 지금처럼 엉성한 장비에 대충 진행하는 것보다 더 잘 갖춰진 환경에서 하면 좋겠다.
여러모로 인디 음악 신에 대해서 뜻이 깊은 사람 같다.
음악적인 성공의 열망에서 한발 물러나 주변인의 입장에서 보면서 다른 친구들이 잘되기를 계속 바라게 된다. 그래서 마음도 많이 써주고, 농담으로 나중에 성공하면 모른 척하지 말라고 그러기도 한다. (웃음)
마지막으로 이즘의 공식 질문이다. 태지윤을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뮤지션은?
거창하게 말하긴 쑥스럽지만 아까도 말한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를 어릴 때부터 제일 좋아해서 다시 언급해야겠다. 그가 기타를 맡았던 오지 오스본의 ‘Mr. Crowley’를 초등학교 6학년 말 정도에 카세트테이프에서 듣고 흔히 말해 전율을 흐르는,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파이프오르간부터 기타 솔로까지 웅장한 분위기가 멋진 곡이다. 내가 한창 음악을 들을 때 사망해서 그런지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 또 한 명의 기타리스트는 머틀리 크루의 믹 마스. 1집부터 매번 발표하는 앨범마다 진보하는 기타 플레이, 톤과 리프 메이킹의 능력, 기타의 깊이 등 계속 발전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 둘 모두 마음속에 깊이 담고 있는 뮤지션들이다.
전혀 다른 장르의 뮤지션으로는 일본의 여성 보컬리스트 자드를 뽑고 싶다. 이유는 비슷한데 다만 본격적으로 투어를 하려던 시점에 건강이 악화되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된 점이 너무도 안타깝다. 이상하게도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 뮤지션들이다. 랜디 로즈는 젊은 나이에 요절을 했고 자드는 그보다는 조금 더 세상을 살았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됐다. 아직 건재한 뮤지션이지만 믹 마스는 희귀성 척추질병을 앓고 있는데 이러한 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더 많은 애착이 간다.
록 음악을 하게 된 것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역시 머틀리 크루지만 비교적 근래에는 오아시스에 더 마음이 간다. 두 밴드 모두 분명 록스타인데 다른 모습이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생각하는 록스타의 이미지는 건스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나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처럼 잘생긴 외모에 화려한 무대매너, 술, 스포츠카 이런 모습이었는데 나도 나이를 먹으니까 좀 달라지더라. 계급 사회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국에서 사회를 비판하며 노동당을 지지하며 자신의 고향 클럽을 응원하며 소탈하게 축구 좋아하고 대중과 함께 공감하는, 그렇게 음악과 삶이 일치하는 어찌 보면 초연한 모습이 더 록스타 같다.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이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가사와 음악을 만들면서 환경 문제에 주목하는 것도 멋있다. 뮤지션 각자의 개성과 지향성, 삶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뮤지션을 좋아해 주는 팬들의 취향도 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진행: 한성현, 손민현, 임선희
사진: 임선희
정리: 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