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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공지] 부평구문화재단 X IZM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4 백영규>
담당자 문화도시추진단 등록일자 2020-07-22 조회수 261 

​[부평구문화재단 X IZM]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4 백영규>

인천 부평구문화재단(대표이사 이영훈)은 대중음악평론 웹진 이즘(IZM)과
한국 대중음악 역사와 함께한 인천·부평 아티스트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라는 타이틀의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에 참여하는 아티스트는
인천·부평을 대표함은 물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다양한 시대의 아티스트를 선정한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이야기는 물론, 각각의 인천 부평에 대한 인연도 들려주었다.
이번 네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추억의 인물이자
현재도 맹렬히 뛰는 레전드 가수 백영규다.





음악계 동향에 밝지 않은 사람에게 백영규는 1980년대 초반 히트 퍼레이드와 당시의 애창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 ‘잊지는 말아야지’, ‘순이생각’, ‘우리 만나요 처음 만난 그곳에서’ 등에 멈춰있겠지만 그 기억은 강렬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 처량함과 비참정서...가녀린 음색에 묻어낸 그 슬픔은 그만의 것이었따. 백영규는 하지만 그 알려진 과거보다는 ‘덜 알려진 현재’가 오히려 더 분주하다.

한마디로 ‘쉼 없음’, ‘꾸준함’이다. 2015년까지 경인방송 라디오 <가고 싶은 마을>을 진행했고 2018년부터는 추억의 음악다방 콘서트 기획 <백다방>의 섭외와 프로듀싱을 도맡아 하고 있다. 원체 바쁜 유전자인 걸까. 코로나시국을 돌파하려는 의도의 노래 ‘천사’를 막 내놓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다른 아닌 부평출신. 부평과 인천 관련 공적인 일에도 열심히 임해오고 있다. 그는 모든 게 음악이라며 음악으로 “삶은 알아간다”고 말했다.

‘1952년생 청년’ 백영규 
“젊음의 비결? 실패하더라도 내지른다!”



Q. 요즘 인터뷰가 자주 눈에 띕니다.
A. 얼마 전 후배가수 김도연과 
‘천사’라는 싱글을 발매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의료진 등을 생각하며 쓴 곡인데 이 노래가 뒤늦게 화제가 됐다. SBS 뉴스까지 나왔더라.(웃음)

Q. 왜 화제가 됐을까요
A. 잘 모르겠다. 질병관리본부 쪽에서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SNS 채널 7군데에 내 노래를 업로드했다.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메일도 따로 받았다. 그냥 의료진 힘내라, 힘내라 말만 하는게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고마움, 존중을 짙게 담으려 했다. 그걸 좋게 봐준 게 아닐까?

Q. 첫 히트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돌아보니 1980년이네요. 대중의 관심을 떠나 정확히 40년을 달려왔습니다. 코로나 시대에도 활동향이 변함없는데...
A. 그렇게 보니 쉬지 않긴 한 것 같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타율이 그리 좋진 않았다.(웃음) 다만 내가 만든 노래가 예상보다도 빨리 대중의 관심을 받고 그 호흡이 좀 길게 이어지면서 초기 활동 기반을 잘 다질 수 있엇다. 이후 제작자로서도 음악가로서도 감을 못잡고 방황한 기간도 길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만큼 감과 을의 격차를 동시에 경험한 사람은 몇 없을 거다.

Q. 꾸준함의 동력은 뭔가요.
A. 요즘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 스스로도 그 이유를 자주 생각하곤 하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라기 보단 그냥 경험이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음반 제작을 하다보면 혼자서 기획 해야지 필드도 뛰어야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경험을 해야한다. 그런 면에서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라디오를 13년간 진행한 건 정말 잘한 일이다. 단순히 출연만 한 게 아니라 기획 연출까지 다 했었는데 거기서 얻은 것들이 참 많다. 그리고 내가 또 일할 때 보면 실패를 하더라도 일단은 내지르는 성격이더라. 그런 것들이 다 합쳐져서 나이를 먹을수록, 요즘 더 할 일이 많다.

Q. 트로트, 댄스,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보입니다. 늘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A. 젊은 문화와의 연계를 의도적으로 의식하고 만들려고 하진 않는다. 녹음실을 자주 들락날락 하다보면 젊어질 수 밖에 없는 건 있다. 엔지니어들이 다 젊지 않나. 자연스럽게 성향이, 또 음악적 성향이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Q. 젊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A. 그들이 듣는 음악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요새 음악 가닥이 되게 많아졌다. 그 다양한 장르 중에 내가 가져갈 수 있는 장르는 무엇인가 늘 고민한다. <이태원 클라쓰>란 드라마를 재밌게 봤는데 거기서 김필이 부른 ‘그때 그 아인’ 같은 노래는 우리 세대 음악가들이 불러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겟더라. 2007년 발표한 내 노래 ‘감춰진 고독’은 요즘 들어 중장년층들에게서 서서히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계속해서 더 많은 세대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곡을 쓰고 싶다.

‘부평’, 음악활동의 길을 트다




Q. 부평이 고향인가요
A.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즈음에 경찰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부평으로 이사 왔다. 부평 4동에 ‘깡마당’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가 내 본가다. 계속 거기서 살면서 인천 동산 중·고등학교를 통학했다.

Q. 부평을 음악적인 면과 연관 지을 수 있겠습니다.
A. 처음 음악을 하게 된 동기가 부평의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 시대가 ‘통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지 않나. 친구가 통기타를 치면 그 멜로디에 내가 보컬을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그렇게 음악에 접어들게 된 거다.

Q. 음악적 데뷔인 듀엣 ‘물레방아’도 그 연장선 상에서 만들어진거죠.
A. 대학 다니면서 ‘물레방아’의 전초격인 그룹을 만들었다. 그때 밴드 이름이 ‘유심초’였다. 유시형, 유의형 형제가 만든 포크그룹 유심초가 바로 이 유심초다. 두 형제들이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도 같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활동했다. 유시형과 훗날 물레방아로 같이 노래한 이춘근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뭉쳐 다니며 음악을 한 거다. 그러다가 나랑 이춘근이 물레방아란 이름으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했다.

Q. 사실상의 고향인 부평에 어떤 인상을 갖고 있나요.
A. 양평 시골 촌놈이던 내게 부평은 정말 커보엿다. 촌사람이 도시로 와서 좀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주눅 들고 소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을 많이 만났다. 앞서 말한 유시형, 유의형은 방앗간 집 셋 째, 넷 째 아들이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내 음악 길이 시작될 수 있었다. 부평에 관한 노래도 많이 썼다. 내게 부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Q. 그 시절 얘기를 조금만 더 하신다면
A. 그때 보통 가수들은 업소에서 노래를 많이 불렀다. 당시에는 그게 돈벌이였고 또 당연한 굴레였다. 근데 나는 그런 경험이 전무했다. 음악다방에서 노래 부른 기억은 있어도 자세 잡고 업소에 정기 출연한 적은 없다. 그런 내게 음악적인 인적 자원들은 정말 소중한 인연이다. 부평에서 만난 다양한 음악 인맥들이 내 길을 넓혀줬다.

Q. 부평과 인천에 관한 노래도 많이 만드셨죠?
A. 부평은 인천의 한 구(區)고 당연히 인천 노래를 조금 만들었다. ‘추억의 신포동’이란 노래 들어봤는지. 2016년 인천시가 인천가치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의 노래 선정 작업을 추진하면서 쓰게 된 곡이다. 신포동은 인천 부평사람이라면 대부분 기억하는 추억의 공간으로 음악다방도 많았따. 당시 팝 가요 청취 수준이 꽤 높앗따. 노래는 1편과 2편이 있는데 내 버전은 재미없고 ‘아라’라는 가수가 부른 게 좋다. 미디로 만든 트로트다. 신포동의 추억을 떠올리며 들으면 좋을 것 같다.

Q.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도 있지 않나요.
A. 인천에 있던 성냥공장을 반추하며 만든 노래다. 인천에 많던 공장들의 역사를 그려보고 싶었고 지금도 그 마음이 있다. 참, 인천 맥주축제 로고송으로 지금도 행사 때 흘러나오는 ‘송도로 가자’도 있다. ‘기차 타고 평양 지나, 파리에서 커피 한잔’이라는 가사가 내가 썼지만 인상적이다. 인천에 대한 애정을 풀어낸 곡이랄까. 그러고 보니 인천 노래를 제법 만든 편이다.(웃음)

부딪히며 익힌 대중감각 “음악적 핵심이던 비애감, 벗어나니 넓어졌다”

Q. 1977년 이춘근과 함께 혼성 듀엣 ‘물레방아’로 데뷔하고 거의 동시에 ‘순이 생각’이 큰 사랑을 받았는데...
A. ‘순이 생각’, ‘슬픈 계절에 만나요’, ‘우리 만나요, 처음 만난 그 곳에서’ 등 많은 곡이 히트했따. 1977년 그룹으로 시작해 1979년부터 솔로음반을 냈다. 이후 1983년까지 총 6개의 정규 음반을 제작햇는데 감사하게도 작품마다 애정 받는 노래들이 꼭 하나씩은 있었다. 음악가로서 축복이기도 하지만 혹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Q. 초창기부터 음반 제작의 많은 부분을 맡았지요
A. 데뷔할 때부터 회사가 나한테 다 맡겼다. 지금도 이해를 못하겠다. 경험도 없는데 왜 나를...(웃음)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배운것들이 많다. 오리엔트 프로젝트의 나현구한테는 순발력을 배웟다. 악보가 안 떠오르면 감각대로 느낌대로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순발력이라고나 할까. 같은 멤버였던 강근식도 좋은 영감을 많이 줬고.

Q. 앞서 말한 축복이 이와 같은 의미인 건가요
A. 백영규는 여태까지 계보가 없었다. 송창식하면 떠오르는 계보가 있지 않나. 나는 음악적인 멘토도 없었고 큰 스승도 없었다. 혼자 나와서 이렇게 하다보니까 음악이 극과 극이다. 잘나오는건 굉장히 잘 나오고 못 나오는 건 못나오고.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냈다. 그래서 창피한 곡도 많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트곡이 많은데요, 그 곡들의 핵심정서는 뭘까요
A. 얼마 전에 보니까 슬픈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 1위에 올랐다더라. (웃음) 굳이 핵심을 따져보자면 ‘비애감’이다. 첫 대중 히트 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 담긴 그 어떤 헤어짐이나 슬픔의 감정들. 그것들이 내 음악을 세상에 많이 알려줬다. 계속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고...

Q. 벗어나고자 했다는 건 무슨 의미죠
A. 나한테는 디렉터가 없지 않나. ‘슬픈 계절에 만나요’가 히트하면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지금은 이렇게 남의 음악도 듣고 할 여유가 있지만 그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한 곡이 히트하면 ‘아 이런 곡을 만들어야 겠구나’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예를 들면 ‘잊지는 말아야지’가 뽕짝이니까 다음 곡 ‘가신 님 그리워’도 비슷하게 만든 거다. 그러면 대중에게 외면 받는다는 걸 그때 당시에는 잘 몰랐다. 그걸 알고 벗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Q. 후회로 남아있나요.
A. 많이 아쉽다. 과거 다양한 선택을 했었다면 백영규 음악관이 달라졌지 않을까. 아쉬웠던 시간들이 있기에 지금은 늘 경계한다. 그때는 수정이라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골치 아프게 수정한다. 모니터링도 하고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곡을 고치곤 한다. 왜 딱 눈치 보면 곡이 괜찮은지 별로인지 알지 않나. ‘천사’도 수정을 되게 많이 한 곡이다.

Q. 근래 백영규 음악스타일은요.
A. 2000년대부터 음악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다. 아까 말한 2007년에 나온 ‘감춰진 고독’을 들어봐라. 멜로디는 단순한 쓰리 핑거에 통기타 음악이지만 편곡 자체에 프로그레시브 스타일을 가미했다. 전주만 해도 일분이 훨씬 넘는다. 이외에도 2016년에 낸 ‘술 한 잔’은 대중 트로트고 ‘얼룩진 상처’도 마찬가지다. 많이 히트는 안됐지만.(웃음)



인기가수, 공연기획자, 라디오진행자인 백영규는 또 딴 가수에게도 곡을 준 싱어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김세화의 ‘아그네스’, ‘타인인 줄 알면서도’, 유심초의 ‘나는 홀로 있어도’, 박정수의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 ‘아름다운 눈물 꽃’이 그가 쓴 곡들이다. 특히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은 서태지와 아이들 광풍이 있끼 전 1991년 빅히트했고 백영규가 직접 제작했다. 음반제작자로도 성공을 거둔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랜 세월을 쉼 없이 달려온 결과, 이렇게 넓은 활동 보폭과 다채로운 입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음악을 통해 삶을 알아간다”


Q. 음악을 하며 가장 기쁠 때는 언제였나요
A.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서는 오히려 못 느꼈다. 남들이 알아주는게 마음으로 와 닿았을 때는 박정수의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을 제작했던 즈음이었다. 돈도 좀 생기고 사람들도 많이 알아봐주고 살 맛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웃음) 제작자로서 우쭐한 그런 것에 취하기도 했고, 거품이 빨리 빠진다는 걸 그땐 잘 몰랐다.

Q. 박정수 정규 1집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은 정말 라디오를 뒤덮었습니다.
A. 히트 이후에 방황도 길엇다. 제작자 입장에서 박정수의 음폭이 넓으니까 그걸 다 쓰고 싶었다. 그러다보니까 음악적으로 자기 만족은 있지만 대중들과 서서히 멀어지게 되더라. 대중음악은 대중이 좋아해야하는데 나는 
‘내가 만들고 대중들은 좋아해라’ 이런 방향으로 변하게 된 거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대중한테 외면을 많이 받았다. 그 버릇을 고치게 된 게 거의 2010년 즈음인 것 같고.

Q. 또 다른 호시절은 없었는지
A. 이건 좀 어려운 얘기인데 음악을 풀어나가는 방법을 스스로 배운 시절을 꼽고 싶다. 통기타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내가 듣기 좋아하는 음악은 어쩔 때는 록이고 또 어쩔 때는 엔야(Enya)풍의 신비로운 곡들이다. 언제인가부터는 또 미디에 손 대게 됐다. 엄청 완성도 있는 음악을 만들고 한 건 아니지만 다양한 장르들을 조금씩이라도 건드려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매번 내가 이런 것들도 할 수 있겠다는 걸 배우고 느끼고 늘 자라고 있다.(웃음)

Q.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수작으로 생각하는 곡이 있나요.
A. 13년 간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제목과 같은 노래 ‘가고 싶은 마을’을 꼽고 싶다. 2015년에 발표했는 데 방송을 하며 받은 영감을 담았다. 그 전 2011년 곡 ‘그리움 안고 헤어지자’도 애정을 갖고 있다. 트로트에 약간의 랩을 넣었다. 음악적 실험을 했던 곡이다.

Q. 백영규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A. 그때그때 답변이 달라진다. 질문이 상당히 방대하지 않나. 다만 가장 솔직한 건 음악을 만드는 방법을 10가지로 하면 10개를 다 통과해야 한다. 그게 정말 힘들다는 거다. 라디오 하면서 이와 관련된 걸 많이 배웠다. 문자가 들어오면 늘 진실한 답변을 하려고 습관을 들였다. 그러니까 청취자들이 굉장히 좋아해줬고 그런 과정들이 가사를 쓸 때 가장 큰 주안점으로 작용했다. 가사를 쓴다기보다 사람을 쓰자 다짐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음악을 통해 삶을 살아간다. 음악은 내게 삶이다.

Q. 백영규 노래는 늘 한편의 슬픈 시와 같습니다. 시적 감성을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A. 습관과 노력이다. 타고난 건 절대 아니다. 멜로디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가사를 써야하는데 그 순간이 정말 괴롭다. 예를 들어 작곡을 한 시간 한다면 가사는 일주일이 걸린다. 그 시간과 순간들을 늘 빼둔다. 주변에서 영감을 얻으려 노력하고 느낀 감정을 그대로 잘 풀어내려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습관적으로 말이다. 최근 백운산 쪽으로 이사를 갔다. 산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웃음)



진행 : 임진모, 김도헌, 박수진,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신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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